[아시아경제] '세한도'의 진정한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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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의 위세는 사그러들 줄 모르고, 장마에 이은 태풍 등으로 피로감은 극도에 달한 요즘 모처럼 마음 훈훈한 낭보를 접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국민의 품에 안기게 됐다는 뉴스였다. 소장자인 손창근(91)씨가 2011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해 온 국보 180호 ‘세한도’를 올 초 박물관에 기증한 사실이 뒤늦게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이다.
손씨는 개성출신 실업가 석포 손세기(1903~1983) 선생의 장남이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고 자신이 수집한 ‘손세기·손창근 컬렉션’ 202건 304점을 지난 2018년 11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최초의 한글서적 용비어천가 초간본(1447년)을 비롯해 추사의 ‘불이선란도’ 등 근검절약하며 쌓은 재산으로 수집했던 귀한 문화재들을 아낌없이 국가와 사회에 내주었다. 2005년,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기탁했다가 기증한 것이었다.
하지만 ‘세한도’만은 기탁 형태를 유지했었다. 이 작품에 대한 선친의 애착이 극진했기 때문일 수 있다. “힘든 일이 있었던 날에도 세한도를 펼쳐 보면 모든 걱정이 일순간 사라진다.”고 했을 정도로 이 작품을 아끼며 곁에 두었다고 전한다.
조선조 문인화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세한도’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지 다시금 생각해 봤다. 이 작품은 잘 알다시피 추사가 1844년 제주도 귀양살이를 할 때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한 작품이다. 창문 하나가 있는 소박한 시골 집을 중심으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는 그림은 단순하다. 이 정도는 금방 따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한도’가 시대를 뛰어넘어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그림이 아니라 이 작품에 담긴 고귀한 정신 때문이다.
‘세한’은 논어 자한(子罕)편에 나온다. '세한연후 지송백지조(歲寒然後 知松柏之凋)’ 즉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안다'는 뜻이다. 조선 3대 천재로 꼽히고, 승승장구하던 추사는 늦은 나이에 절해고도에 유배됐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관계를 끊었지만 제자 이상적은 달랐다. 역관으로 중국을 자주 드나들면서 귀한 금석문이나 책을 구해 스승에게 보내준 것에 감동해 추사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노송은 추사 자신이요, 제자 이상적은 끝까지 푸르름을 간직한 잣나무였다. 당시 59세의 환갑을 넘긴 추사가 처한 물리적, 정신적 고달픔과 메마름을 보여주듯 건조한 먹과 거친 필선(갈필)으로 표현했다. 그림에 담긴 주제와 표현법이 어우러져 고도의 예술적 에너지를 함축한 작품의 오른 쪽 아래에 추사는 붉은 낙관을 찍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추사는 학예일치의 경지를 지향했다.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어찌 이리 완벽할까.
이상적은 연행길에 이 작품을 청나라 문인들에게 보였다. 이들 역시 사제간의 의리를 높이 사며 감상문을 지었다. 가로 69.2㎝, 세로 23㎝인 그림은 청나라 명사 16명의 감상문과 오세창, 정인보의 글이 붙으면서 10m가 넘는 두루마리 대작이 됐다.
‘세한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무사 안착할 수 있게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사연들도 이 작품의 가치를 한층 높여준다. 세한도는 이상적이 죽은 뒤 그의 제자 김병선과 아들 김준학을 거쳐 민영휘와 그의 후손이 소유했다가 경매를 통해 추사 연구가인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에게 넘어갔다. 1944년 후지쓰카를 설득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가져온 이는 서예가 손재형씨였다. 안 팔겠다는데도 두달간 매일 문안인사처럼 찾아가자 후지쓰카는 “세한도를 간직할 자격이 있다”며 아무 대가없이 세한도를 건네주었다. 손재형씨가 후에 정치에 참여하면서 돈이 필요해지자 이 그림을 저당잡히고 급기야 경매에 내놓게 되는데 이 때 세한도를 구매한 이가 손세기씨였다.
개성 출신으로 문화재 사랑이 극진했던 손세기씨는 자신이 수집한 고서화 200점을 1974년 서강대에 기증했다. 손창근씨도 선친의 나눔 정신을 이어갔다. 국립중앙박물관회에 연구비 1억원 기부(2008년), 50년간 직접 나무를 심고 가꾼 용인의 산림 200만평 국가 기증(2012년)에 이어 2017년엔 미수연을 기념해 50억원 상당의 건물과 1억원 연구비를 KAIST에 기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오는 11월경 세한도를 보여주는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어지럽고 혼탁한 시대에 이 작품 앞에서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 들이 참 많다.
함혜리 칼럼니스트 2020. 09. 08 게재기사